콘텐츠의 중심축이 변화하고 있다.과거에는 출연자의 스타성, 프로그램 포맷, 방송 시간대가 흥행을 결정했다면,
지금은 “누가 만들었느냐”가 콘텐츠의 품질을 보증하고, 팬덤을 형성한다.즉, 제작자가 곧 브랜드가 되고, PD와 연출자가 스타가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한국의 <출장 십오야>와 영국의 <The Grand Tour>다.이 두 프로그램은 모두 연출자의 고유한 세계관과 유머, 미장센, 기획 철학이 전면에 드러나는 콘텐츠다.형식은 다르지만, 제작자의 개성이 콘텐츠를 이끄는 동력이라는 점에서는 완벽히 맞닿아 있다.‘출장 십오야’는 나영석 PD라는 브랜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송국과 출연자들을 연결하며
예능 포맷을 압축, 재구성, 패러디하는 콘텐츠 실험실이며,‘The Grand Tour’는 BBC 출신 자동차 예능의 전설적 제작진이 중심이 되어기존 포맷을 해체하고 유쾌한 모험과 탐험의 서사를 펼치는 영국식 제작자 콘텐츠다.
두 프로그램은 콘텐츠 소비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준다.이제 사람들은 '이 콘텐츠에 누가 나오냐'보다 '누가 만들었냐'에 더 반응한다.그리고 이 새로운 주체성은 콘텐츠 시장 전체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출장 십오야: 포맷을 뒤틀고 웃음을 설계하는 나영석 월드
<출장 십오야>는 tvN 및 유튜브 채널 ‘채널 십오야’를 통해 공개된 나영석 PD의 기획 중심 예능 콘텐츠이다.
기존 방송사, 제작 환경, 장르를 모두 해체한 이 콘텐츠는사실상 나영석이라는 ‘예능 유니버스의 설계자’가 직접 등장하고 조작하며,
출연자들을 몰아붙이고, 포맷 자체를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하는 실험적 예능이다.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출장 게임'이다.
나영석 PD는 인기 있는 예능 촬영 현장을 찾아가 출연자들에게 각종 게임 미션을 즉석에서 던지고,
그 반응과 실패, 창피함, 성공을 통해 자연스럽게 웃음을 끌어낸다.‘출장 십오야’라는 제목 자체가 이미 ‘즉흥성’과 ‘압축성’을 상징한다.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단순한 게임 예능이 아니라는 점은 게임의 내용보다도, 그 게임을 설계한 나영석의 유머와 장난기,
그리고 그로 인해 무너지는 출연자들의 리액션에 방점이 찍힌다는 데 있다.카메라 밖에서 PD가 목소리로만 등장하거나,직접 화면에 나와 상황을 주도하는 연출 방식은 예능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고, 메타 유머를 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출장 십오야>는 기존 방송 시스템의 경계를 넘는다.tvN뿐 아니라 넷플릭스(<슬기로운 의사생활>, <지금 우리 학교는>), JTBC(<아는 형님>),유튜브 크리에이터, 아이돌 그룹까지 포맷을 넘나들며나영석 PD가 중심이 되어 플랫폼과 출연진을 하나로 묶는 하이브리드 콘텐츠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러한 방식은 한국 콘텐츠 시장의 유연성과 PD 중심 제작 문화를 상징하며,시청자는 프로그램을 보기 전부터 ‘나영석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신뢰와 관심을 갖게 된다.
The Grand Tour: 포맷의 해체와 모험, 영국식 제작자 브랜드의 완성형
<The Grand Tour>는 BBC의 인기 프로그램 <Top Gear>의 원년 제작진이아마존 프라임과 계약을 맺고 새롭게 만든 자동차 예능 시리즈다.제레미 클락슨, 제임스 메이, 리처드 해먼드 세 사람은 출연자이자 제작자이며, 동시에 브랜드의 정체성 그 자체다.
<The Grand Tour>는 자동차를 매개로 하지만,그 안에서 펼쳐지는 내용은 단순한 시승기나 성능 리뷰가 아니다.
각종 국가를 넘나드는 여행, 차량 개조 미션, 황당한 경쟁 구도,시사 풍자, 영국 특유의 드라이한 유머까지 전통적인 자동차 리뷰 포맷을 완전히 해체하고 하나의 대서사로 재구성한다.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자동차’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는 점이다.
여기서 자동차는 남성성, 기술, 자아 실현, 문화적 아이콘을 탐구하는 하나의 매개체이며,세 명의 주인공은 그 자동차를 통해 서로 다른 세계관을 충돌시키고 유희를 만든다.또한 <The Grand Tour>는 카메라, 드론, 액션캠을 활용한 영화 수준의 촬영 퀄리티와 후반 작업으로 리얼리티의 경계를 넘는 시네마틱한 예능으로 완성된다.그것은 마치 다큐멘터리와 영화, 코미디, 여행기, 실험 예능이
모두 섞인 하이브리드 포맷이라 할 수 있다.무엇보다 중요한 점은‘이 콘텐츠는 제작진이 주도한다’는 메시지가 전면에 드러난다는 것이다.클락슨과 제작진의 세계관, 가치관, 취향이 모든 에피소드의 설계에 반영되며,그들이 곧 브랜드가 되어 시청자의 신뢰를 얻는다.이 방식은 영국 특유의 크리에이티브 중심 문화,창작자의 독립성과 자율성 중시 철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이는 미국식 대형 제작 시스템과도 차별화되며,콘텐츠 제작자들이 출연자와 동일한 존재감과 영향력을 갖는 모델을 정착시켰다.
제작자가 콘텐츠의 주인공이 될 때 생기는 문화적 변화
‘출장 십오야’와 ‘The Grand Tour’는 형식도 장르도 다르지만,모두 “연출자가 곧 콘텐츠의 중심”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대표한다.
이들은 단지 카메라 뒤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콘텐츠를 설계하고, 주도하고, 관객과 교감하는 적극적인 퍼포머로 진화했다.
<출장 십오야>는 한국 예능이 가진 기민한 편집 감각, 즉흥적 기획력, 연출자의 유머 감각을
가장 극대화한 콘텐츠라 할 수 있다.이 프로그램은 포맷보다 제작자의 창의성과 캐릭터가 더 중요한 시대를 상징하며,유튜브 기반의 빠른 소비 패턴과도 잘 어우러진다.반면 <The Grand Tour>는 영국 특유의정교한 제작, 시네마틱 구성, 창작자의 개성화 전략이 결합된 콘텐츠다.이 프로그램은 기존 장르를 해체하면서도, 제작자의 색을 끝까지 유지하며 브랜드화에 성공한 제작자 중심 예능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두 프로그램 모두 콘텐츠가 단지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창작자의 철학과 유머, 세계관까지 함께 전달되는 예술적 창작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이것은 곧, “PD나 제작자가 스타가 되는 시대”의 본격적인 도래를 의미한다.그리고 이 변화는 단지 예능 시장만이 아니라,모든 콘텐츠 산업의 권력 구조와 창작 생태계를 바꾸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